서양철학사 읽기 ⑧ 사모스에서 크로톤으로, 구파와 신파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은 누구나 수학 시간에 한 번은 듣는다. 그런데 그 이름의 주인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놀랄 만큼 적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기원전 6세기 말 피타고라스가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 세운 종교적·철학적 공동체와 그 후계자들로, 초기의 구파와 수백 년 뒤 되살아난 신파로 나뉜다. 이번 글은 이 학파의 바깥 역사를 따라간다.
이 연재가 따르는 힐쉬베르거의 목차는 이 장에 질료와 형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까닭은 어렵지 않다. 탈레스에서 아낙시메네스까지 밀레토스 사람들은 세계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물, 무한정한 것, 공기는 모두 재료, 곧 질료에 대한 답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질문을 바꾸었다. 세계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보다 어떤 질서로 짜여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 질서의 이름이 수와 비례, 넓게 말해 형상이다. 이 생각의 속살은 ⑨ 생활양식과 ⑩ 형이상학에서 다루고, 이번에는 사람과 사건부터 본다. 미리 일러두자면, 피타고라스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수학이 아니라 의심하는 법이다.
세 줄 요약
- 피타고라스는 크로톤에 신앙과 학문의 공동체를 세웠다.
- 그의 모습은 수백 년 뒤의 전기로 크게 부풀려졌다.
- 학파는 구파와 신파로 두 번 태어났다.
사모스의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 무렵 에게해 동쪽의 섬 사모스에서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탈레스의 밀레토스와는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 젊은 시절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다니며 지혜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무엇을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멀리서 배워 왔다는 말은 고대 그리스 현자의 이력서에 으레 붙는 문구였다.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은 짧지만 생생하다. 크세노파네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얻어맞는 강아지의 울음소리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알아보고 매를 멈추게 했다. 놀리려고 지은 이야기지만, 덕분에 우리는 그가 영혼이 죽은 뒤 짐승의 몸으로도 옮겨 간다고 가르쳤다는 것을 안다. 이 영혼 윤회의 가르침은 오르페우스교와 가까운 친척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많이 아는 것이 분별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며 피타고라스를 그 본보기로 꼽았다. 비난도 명성의 한 형식이다.
기원전 530년 무렵, 마흔 살쯤 된 피타고라스는 고향을 떠났다. 535년 무렵부터 사모스를 다스린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독재를 피해서였다고 한다. 행선지는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 크로톤이었다. 철학이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로 건너간 순간이다.
크로톤의 공동체와 그 몰락
디카이아르코스에 따르면, 크로톤에 온 피타고라스는 원로들 앞에서 연설한 뒤 그들의 부탁으로 젊은이와 소년, 여성들에게도 따로 연설했다. 그가 세운 것은 학교라기보다 형제단에 가까웠다. 구성원들은 가르침을 밖으로 옮기지 않았고, 먹고 입고 하루를 보내는 방식까지 규칙을 따랐다. 그 내용은 다음 편 피타고라스적 생활양식에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임이 정치에도 손을 뻗어, 크로톤과 이웃 도시들의 지배층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닫힌 모임이 권력을 쥐면 문밖의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크로톤의 부유한 귀족 킬론이 공동체에 들어가려다 거절당한 뒤 반대파를 이끌었다. 기원전 510년 무렵 피타고라스와 그 무리는 공격을 받았고, 피타고라스는 이웃 도시 메타폰티온으로 몸을 피했다. 그는 그곳에서 기원전 490년 무렵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수백 년 뒤 키케로는 메타폰티온에 들러 그가 생을 마친 자리를 둘러보았다고 적었다. 로마의 정치가가 순례를 할 만큼, 그 무렵 피타고라스는 이미 성인(聖人)이 되어 있었다.
기원전 450년 무렵에는 더 큰 폭력이 닥쳤다. 남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피타고라스 사람들의 집회소가 습격당했고, 크로톤에서는 밀론의 집에 모여 있던 이들이 불길 속에 목숨을 잃었다. 후대의 전기들은 이 사건을 피타고라스 생전의 일과 뒤섞어 전한다. 두 번의 박해를 가려내는 것부터가 역사가의 일이다.

| 때 | 일어난 일 |
|---|---|
| 기원전 570년 무렵 | 사모스에서 피타고라스가 태어남 |
| 기원전 530년 무렵 | 남이탈리아 크로톤으로 이주 |
| 기원전 510년 무렵 | 킬론 무리의 공격, 메타폰티온으로 피신 |
| 기원전 490년 무렵 | 메타폰티온에서 세상을 떠남 |
| 기원전 450년 무렵 | 남이탈리아 곳곳의 집회소 습격 |
| 기원전 350년 무렵 | 초기 학파(구파)가 사라짐 |
| 기원전 1세기 | 로마에서 되살아남(신파) |
| 기원후 3~4세기 | 포르퓌리오스·이암블리코스의 전기 |
전설과 역사 사이의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책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동시대인이 그의 사상을 자세히 기록한 것도 없다. 그의 이름으로 된 글이 뒷날 여럿 나돌았지만 모두 후대의 위작이다. 그런데도 긴 전기가 있는 것은, 그가 죽고 700~800년 뒤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포르퓌리오스, 이암블리코스가 차례로 그의 생애를 썼기 때문이다. 멀어질수록 더 잘 보이는 망원경은 없는데, 피타고라스의 전기는 그런 망원경처럼 작동했다.
전기 속 이야기는 기적으로 가득하다. 황금 허벅지를 드러내 보였다, 같은 시각에 크로톤과 메타폰티온에 동시에 나타났다, 강물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다. 이런 이야기 일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잃어버린 피타고라스학파 연구서에 이미 실려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죽은 지 한 세기 반 만에 반쯤 신이 되어 있었다. 기적은 제자들이 스승에게 바치는 가장 흔한 선물이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다. 일반적 해석은 이 관계가 그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본다. 기원전 18세기 무렵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에 이 관계를 만족하는 세 수의 목록이 이미 적혀 있다. 그가 정리를 발견하고 소를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를 옮긴 프로클로스조차, 그가 정리를 증명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교과서의 증명은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의 것이다. 다른 해석은 조금 너그럽다. 그의 학파가 이런 수학적 사실을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 끌어올렸으니 이름값은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발견한 사람보다 널리 알린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때가 많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을 피타고라스가 처음 썼다는 이야기도 같은 부류다. 플라톤의 제자 헤라클레이데스에게서 나온 이 일화는, 그 속의 철학관이 너무 플라톤적이어서 피타고라스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피타고라스는 후배들이 자기 생각을 맡겨 두는 은행이 되었다. 예금주는 대개 플라톤주의자들이었다.
구파: 아쿠스마티코이와 마테마티코이
피타고라스가 죽은 뒤 학파는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아쿠스마티코이(akousmatikoi), 곧 들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승이 남긴 짧은 계율과 금기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피타고라스의 길이라고 믿었다. 다른 쪽은 마테마티코이(mathēmatikoi), 곧 배움을 따르는 사람들로, 수학과 자연 탐구를 학파의 본령으로 보았다. 이암블리코스에 따르면, 앞쪽은 뒤쪽의 학문이 히파소스에게서 나왔을 뿐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교리를 지키려는 사람과 교리를 따지려는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오래 살기는 어렵다.
히파소스는 기원전 5세기 메타폰티온 사람으로, 두께가 다른 청동 원판으로 소리의 어울림과 수의 비율을 보여 준 실험을 남겼다. 정십이면체 만드는 법을 세상에 알린 죄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뒷날 이것이 무리수의 비밀을 폭로했다가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바뀌어 퍼졌다. 그러나 히파소스를 무리수와 직접 이은 고대 기록은 없다.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하는 것이 좋다.
필롤라오스(기원전 470년 무렵~390년 무렵)는 책을 쓴 첫 피타고라스학파다. 그는 세계가 한정하는 것과 한정되지 않는 것으로 짜여 있고, 우리가 무엇을 안다면 수를 통해 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우주론은 대체로 그의 책에 기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동안 테바이에 머물렀는데,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두 젊은이가 그곳에서 필롤라오스의 강의를 들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그의 책을 사서 『티마이오스』를 썼다는 험담도 고대에 돌았다. 험담의 진위와 관계없이,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이 플라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아르퀴타스(기원전 420년 무렵~350년 무렵)는 남이탈리아 타라스의 정치가이자 장군이었고, 피타고라스 전통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수학자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정육면체의 부피를 두 배로 만드는 문제를 입체 기하학으로 풀었고,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2세에게 붙들려 있던 친구 플라톤을 배를 보내 구해 냈다고 『일곱째 편지』는 전한다.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꿈꾼 플라톤에게, 수학자이면서 장군인 친구는 살아 있는 증거처럼 보였을 것이다.
크로톤의 의사 알크마이온은 흔히 이 학파 곁에 놓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학파의 일원으로 세지 않았다. 이웃에 살며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 집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초기 학파는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끝난다. 아리스톡세노스가 마지막 피타고라스학파로 꼽은 이들 가운데 플레이우스의 에케크라테스가 있는데, 『파이돈』은 바로 이 사람에게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학파는 플라톤의 대화편 속에서 조용히 무대를 내려갔다.
신파: 신피타고라스주의
그 뒤 두 세기 남짓 피타고라스학파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가,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키케로의 친구 니기디우스 피굴루스가 그 가르침을 되살리려 했다. 이 흐름을 신피타고라스주의(Neopythagoreanism)라 부른다. 기적을 행했다는 떠돌이 현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가데스의 모데라투스, 산술 입문서가 보에티우스의 라틴어 번안을 거쳐 중세의 교과서가 된 게라사의 니코마코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한 몸처럼 읽은 아파메이아의 누메니오스가 기원후 1~2세기의 대표 인물이다.
신파는 역사적 근거 없이 피타고라스를 그리스 철학 전체의 원천으로 떠받들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까지 그에게 돌렸다. 이 흐름은 3~4세기 포르퓌리오스와 이암블리코스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우리가 아는 기적의 피타고라스는 대부분 이 사람들이 그린 초상이다. 초상화가 모델보다 훨씬 유명해진 경우다.
| 구분 | 구파(초기 학파) | 신파(신피타고라스주의) |
|---|---|---|
| 시기 | 기원전 6~4세기 | 기원전 1세기~고대 말 |
| 무대 | 남이탈리아, 테바이 | 로마와 동방의 도시들 |
| 대표 인물 | 필롤라오스, 아르퀴타스 | 니코마코스, 누메니오스 |
| 성격 | 공동체, 수학, 우주론 | 플라톤주의와 결합 |
| 피타고라스 | 공동체의 스승 | 모든 철학의 원천 |
그러니 피타고라스학파의 바깥 역사는 세 겹의 피타고라스를 보여 준다. 크로톤에서 제자들을 모은 역사 속 인물, 초기 학파가 기억한 스승, 수백 년 뒤 플라톤주의자들이 받든 성인이다. 셋 모두 철학사에 실제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셋 모두 어느 정도는 진짜다. 다음 편에서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 침묵을 지키고 콩을 멀리한 그 기묘한 생활양식을 들여다본다.
서양철학사 읽기 · ① 신화란 무엇인가 · ②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 · ③ 오르페우스교의 가르침 · ④ 미토스와 로고스 · ⑤ 탈레스 · ⑥ 아낙시만드로스 · ⑦ 아낙시메네스 · ⑧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학파 · 다음 편: ⑨ 피타고라스적 생활양식
자주 묻는 질문
피타고라스학파란 무엇인가요?
기원전 530년 무렵 피타고라스가 남이탈리아 크로톤에 세운 공동체와 그 후계자들을 말한다. 영혼 윤회를 믿고 엄격한 생활 규칙을 지키는 종교적 모임이면서, 수와 비례로 세계를 설명하려 한 학문 공동체였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 사라진 초기 학파와 기원전 1세기에 되살아난 신피타고라스주의로 나누어 본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정말 피타고라스가 발견했나요?
그렇게 보기 어렵다.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에는 그보다 1,000년도 더 앞서 이 관계를 만족하는 수의 목록이 적혀 있다. 고대의 전승도 그가 이 정리를 알았다고 할 뿐 증명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과서의 증명은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에 실린 것이다.
신피타고라스주의는 초기 피타고라스학파와 어떻게 다른가요?
초기 학파는 기원전 6~4세기 남이탈리아에서 실제 공동체를 이루고 수학과 우주론을 연구했다. 신피타고라스주의는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와 동방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으로, 피타고라스를 모든 철학의 원천으로 받들며 플라톤주의와 깊이 섞였고 결국 신플라톤주의에 흡수되었다.
함께 읽을 책
- 『서양철학사』 상권, 요한네스 힐쉬베르거(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이 연재가 따라가는 목차의 원본. 피타고라스학파를 외적인 역사, 생활양식, 형이상학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탈레스 외(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피타고라스와 필롤라오스, 아르퀴타스에 관한 고대 증언을 원문과 함께 읽을 수 있다.
- Pythagoras and the Pythagoreans: A Brief History, 찰스 H. 칸(영어판, Hackett): 전설과 역사를 가려 가며 피타고라스 전통 전체를 짧게 훑는 안내서.
참고문헌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상권(개정판),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 Diogenes Lae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VIII.1–50, 79–85.
- Porphyry, Life of Pythagoras; Iamblichus, On the Pythagorean Life 81, 88, 248–264; De communi mathematica scientia 25.
- Herodotus, Histories 2.81, 4.95.
- Xenophanes, DK 21 B7; Heraclitus, DK 22 B40, B129.
- Aristotle, Metaphysics I.5, 985b23–986b8; fragments on the Pythagoreans (Rose fr. 191).
- Plato, Phaedo 57a, 61d–e; Seventh Letter 350a–b.
- Cicero, De finibus V.4; Tusculan Disputations V.8–10.
- Proclus, Commentary on the First Book of Euclid’s Elements 426; Euclid, Elements I.47.
- Walter Burkert, Lore and Science in Ancient Pythagoreanism, Harvard University Press, 1972.
- Charles H. Kahn, Pythagoras and the Pythagoreans: A Brief History, Hackett, 2001.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Pythagora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Pythagoreanism”
Pythagoras and the Pythagoreans
From Samos to Croton: the old school and the new
Pythagoras is the most famous name in early Greek philosophy and one of the least documented. Born on Samos around 570 BCE, he left the island around 530 BCE, reportedly to escape the tyranny of Polycrates, and settled in Croton in southern Italy. There he founded a community that was part religious brotherhood, part school and part political club. He taught that the soul passes after death into other bodies, even those of animals, and his followers lived by strict rules. Around 510 BCE a backlash, associated in ancient reports with a rejected nobleman named Cylon, drove him to Metapontum, where he died around 490 BCE. A second wave of violence around 450 BCE destroyed Pythagorean meeting houses across the region.
Pythagoras wrote nothing. The long biographies we have were written seven or eight centuries after his death, by Diogenes Laertius, Porphyry and Iamblichus, and they are full of miracles: a golden thigh, appearing in two cities at once, a river that greeted him by name. Even the theorem that bears his name was known to Babylonian scribes more than a thousand years earlier, and no ancient source credits him with its proof.
After his death the school split between the akousmatikoi, who kept the master’s sayings and taboos, and the mathematikoi, who pursued mathematics and natural science. Philolaus wrote the first Pythagorean book; Archytas of Tarentum, statesman and mathematician, was Plato’s friend. Early Pythagoreanism faded around 350 BCE. It was revived from the first century BCE as Neopythagoreanism, which made Pythagoras the source of all Greek philosophy and eventually merged into Neoplatonism. The miracle-working sage of popular memory is largely their creation.
FAQ
Did Pythagoras discover the Pythagorean theorem?
Probably not. Babylonian tablets list Pythagorean triples centuries earlier, and ancient sources say only that he knew the theorem, not that he proved it.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early Pythagoreans and the Neopythagoreans?
The early Pythagoreans were an actual community in southern Italy (6th–4th century BCE). The Neopythagoreans were a later revival (1st century BCE onward) that blended Pythagorean ideas with Platonism.
